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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체사레 보르자, 우아한 냉혹

보르자, 유화,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Uffizi 소장

Duca Valentino. duc de Valentinois라고도 함.
통칭 발렌티노 공작. 
 

1475/76경 이탈리아 로마(?)~1507 스페인 비아나 근처.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그의 가장 유명한 정부 반노차 카타네이 사이에서 탄생.
정부 반노차 카타네이는 체사레, 후안, 루크레치아, 조프레를 낳았다.
체사레는 반노차에게는 장남, 아버지에게는 차남.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많은 자식을 두었지만
그 중에서도 체사레 보르자와 루크레치아 보르자가 가장 유명.

루크레치아 보르자.
아버지와 오빠의 정치적 야망 때문에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야 했다.
아버지와 오빠들이 지나치게 아끼고 사랑한 탓에,
부녀, 형제간에 근친상간적 관계였다는 설이 있다.
총 세 번의 결혼을 했고, 33세의 나이에 막내딸을 조산하고 세상을 떠났다.
첫번째 남편 : 페사로 공작 조반니 스포르차
서류상의 결혼이었으나 아버지의 권세를 이용하여 무효라고 선언.
조반니 스포르차는 엄청난 액수의 돈을 받고 혼인 무효 재판에서
스스로를 오입쟁이라고 표현하여, 그의 별명이 오입쟁이 남편이 되었다.
두번째 남편 : 나폴리의 비셀리 공작 알폰소 다라곤
오빠 체사레와 남편간의 불화로 인해 오래가지 못하고 끝났다.
체사레가 비셀리 공작 암살. 이때 루크레치아는 임신 6개월.
세번째 남편 : 페라라 공작 알폰소 데스테
그녀의 마지막 결혼으로 18년동안 순탄하게 이어졌다.

핀투키리오, 보르자의 아파트 벽화 속의 루크레치아.

루크레치아는 정식으로 결혼한 남편말고도 여러 명의 애인을 두었다.
이 때문에 그녀는 훗날 악녀로 잘못 오인되고는 한다.
가장 유명한 애인은 만토바 공국의 공작으로 시누이 이사벨라의 남편 프란체스코 곤차가였고,
다른 한 사람은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인문학자이자 시인인 피에트로 벰보였다.

왼쪽, 루크레치아의 세번째 남편 알폰소 데스테. 바스티아니노.
오른쪽, 루크레치아의 애인 피에트로 벰보. 티치아노.

알폰소는 아내의 바람이 단순히 바람이 아님을 눈치채고
피에트로 벰보를 찾아가 직접 담판을 짓는다.
벰보는 곧 페라라를 떠났고, 루크레치아는 더이상 애인을 만들지 않았다.


로마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문화적 바탕은 스페인. (당시 에스파냐)
이복형인 페드로 루이스는 간디아 공작이었고,
체사레가 성직자가 된 후 처음 받은 성직령은 스페인에 있었다.

<카이사르가 아니면 無>
얄궂게도 체사레의 이름은 Cesare,
이탈리아어로는 체사레, 라틴어로는 카이사르였다.
로마 제정의 밑바탕을 닦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같은 이름으로,
그는 카이사르를 동경하고, 스스로 그와 같은 영웅이 되고자 했다.

CES.BORG.CAR.VALENT
발렌티노 추기경 체사레 보르자.

1482년, 7세 때 교황청 서기장 겸 발렌시아 성당의 참사회원으로 임명
1488년, 13세 때 이복형 간디아 공작 페르도 루이스 사망.
체사레의 동생 후안이 공작 작위를 이어받음.
1489년, 14세 때 페루자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다가
피사 대학으로 옮겨 교회법과 민법으로 학위 취득.
1491년, 16세 때 팜플로나 주교 서임
1492년, 17세 때 아버지 로드리고 보르자 추기경 교황 즉위. 알렉산데르 6세.
발렌시아 대주교 서임
1493년, 18세 때 명의성당 산타마리아노바 교회를 맡은 추기경 서임
성직자의 의무보다는 사냥과 파티, 호색적인 간통 및 화려한 옷차림을 즐기는 인물로 알려졌다.

1496년, 21세 때 알렉산데르 6세, 오르시니 가문을 몰살하기 위한 첫번째 원정대 조직.
교황군 사령군으로 후안 임명.
1497년, 22세 때 동생 후안 살해당함.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1498년, 23세 때 추기경의 지위 포기.
나폴리 공주 카를로타와의 결혼시도 실패.
루크레치아의 두번재 남편 비셀리 공작 암살.
프랑스 왕 루이 12세의 주선으로 나바라 왕의 여동생 샤를로트 달브레와 결혼.
이 결혼에서 외동딸을 얻었다.
루이 12세가 발렌티누아 공작 칭호 수여.
발렌티노 공작이라는 별명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발렌티누아를 이탈리아식으로 발음하면 발렌티노가 된다.
운명의 장난인지, 그가 대주교로 있었던 성직령 발렌티노와 발음이 같다.
1499년, 24세 때 교황군 총사령관으로 임명
프랑스의 도움을 얻어 로마냐와 레마르케 지방의 도시들을 조직적으로 점령.
이몰라와 포를리 정복.
1500~01년, 25~6세 때 리미니, 페사로, 파엔차 정복
1500년 8월, 여동생 루크레치아의 2번째 남편 비셀리 공작 암살
1502~3년, 27~8세 때 우르비노, 카메리노, 세니갈리아 정복
마키아벨리, 마지막 원정에서 피렌체 편으로 가담하여
체사레의 정복활동을 지켜봄.
유명한 마조네 음모 발발.
음모의 주동자들을 체포하여 처형.

1503년 8월, 28세 때 아버지 알렉산데르 6세 말라리아로 사망.
체사레 역시 말라리아에 전염.
토스카나 지방 공략 실패.

보르자 가문의 원수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 추기경, 교황 율리우스 2세로 즉위.
율리우스 2세, 체사레를 로마냐 공작과 교황군 총사령관으로 승인을 거부하고,
로마냐 지방의 도시들을 반환하라고 요구.
체사레, 반환요구 동의. 나폴리로 탈출.
스페인 부왕 곤살로 데 코르도바에게 또다시 체포.
스페인으로 압송. 발렌시아 근처의 친치야 성에서 메디나델캄포로 이송.

1506년, 31세 때 탈출. 처남인 나바라 왕에게 의탁.
1507년, 32세 때 비아나 외곽에서 나바라 반역자들과 소규모 전투를 벌이다가 전투.
비아나의 산타마리아 교회에 매장.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 <체사레 보르자, 우아한 냉혹>에 실린 체사레의 초상화.
반노차 카타네이가 낳은 4남매는 그 미모가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체사레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라고 일컬어졌고,
루크레치아도 천상의 여인이라 칭송받았다.
그러나 체사레와 루크레치아의 소생들은 부모의 아름다움을 전혀
이어받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만화와 게임 속의 체사레

히구리 유우의 <칸타렐라>

체사레 뒤에 있는 남자가 그 유명한 돈 미켈레토.
체사레의 심복으로 주로 암살을 담당.
체사레 사후로도 변치 않은 충성을 바쳤다.


사이토 치호의 <화관의 마돈나>

마지막 그림은 체사레가 말라리아에 걸렸을 때의 모습.


게임 창세기전 외전 <서풍의 광시곡>

 
개인적으로 체사레 보르자라는 인물을 가장 잘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미중년 좋아.....)


…(전략)…교황의 아들이라는, 기독교 세계의 이단아로 태어났고,
그러면서도 당시의 최고 권위인 로마 교회를 철저하게 자기를 위해 이용함으로써
기독교를 모멸했으며, 한때 몸에 걸쳤던 추기경의 주홍색 법의,
평생의 영예와 안정을 보장해 주는 그 법의 마저 벗어 던지고
이탈리아를 통일하여 자기의 왕국을 창건하려 했던 그의 야망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500년 동안 역사가 그를
'르네상스 시대의 메피스토텔레스'라 탄색해 온 이유가 되었다.

역사뿐 아니다. 문학도 음악도 마찬가지다. 빅토르 위고는 그의 희곡 '루크레치아 보르자'에서,
도니제티는 같은 이름의 오페라에서 그랬다. 보르자(家)의 독약이라는 영화까지 만들어졌다.

그러나 메피스토텔레스의 매력은 불멸이다.

버트런드 러셀도 말하지 않았던가.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착한 사람에게서보다 악한 사람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배운다."고.
 체사레 자신은 생전에 단 한번도 자신을 변호하려 하지 않앗다.
자기의 악업에 대한 그의 변명은 그것이 한 계책으로서 유효한 경우에 한한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극도로 말이 적은 사나이였다. …(후략)…

-시오노나나미,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 서문 中-


by 유예 | 2007/09/23 21:13 | 눈 번뜩이는 자료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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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수고친구 at 2007/11/26 20:11
자료 참고에 정말 좋은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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